[이규섭 시인님] 동네 목욕탕이 사라진다
[이규섭 시인님] 동네 목욕탕이 사라진다
by 이규섭 시인님 2022.01.21
‘로마가 목욕 문화와 향락으로 망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다. 2000년 전쯤에 이미 목욕 문화가 발달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잿더미에 묻혔던 고대 도시에 공중목욕탕이 있었다는 게 놀랍다. 목욕탕 천정에 창을 내 자연의 빛을 끌어들였다. 목욕실 벽은 단열효과를 낼 수 있게 이중구조로 설계했다. 올리브오일을 몸에 바르고 마사지를 받는 서비스 공간도 있었다. 공중목욕탕 부근엔 유곽(遊廓)이 있고, 야한 벽화가 선명하게 남아 향락과 타락의 흔적을 엿본다.
성경의 역사를 간직한 땅 터키 에페소스에도 대목욕장 건물 형체가 남아 있다. 지진으로 파괴된 목욕장을 BC 4세기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10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대목욕장에는 온탕, 냉탕, 사우나, 휴게실, 체육시설까지 갖췄다고 한다. 인근 공중화장실은 수세식이다. 홈통 아래로 떨어진 오물은 목욕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씻겨 내려간다. 귀족용은 대리석이다. 좌변에 앉아 그 시절을 상상해 본다. 로마제국의 목욕 문화는 사치와 향락으로 타락을 자초했고 망하는 단초가 됐다.
우리나라 목욕탕은 일제강점기 때 태동했다. 일본인들과 선교사들이 드나들면서 서양인을 상대로 욕실을 부대시설로 갖춘 호텔과 여관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발전의 계기가 됐다. 근대적 형태의 대중목욕탕은 1924년 평양에서 첫선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행정관청인 부(府)에서 관리를 맡았다. 서울에서는 이듬해 첫 대중목욕탕이 문을 열었고, 광복 이후 빠르게 늘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땐 거의 매일 목욕탕에 들리는 마니아였다. 새벽에 출근하여 전쟁을 치르듯 신문 1판을 마감하고 나면 피로가 밀물져 온다. 지방판 제작까지는 서너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 그 짬을 활용하여 목욕탕에 들러 땀을 흠뻑 빼고 나면 심신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면서 에너지가 충전된다.
일요일엔 동네 목욕탕엘 들린다. 혼자 가는 경우가 많지만 아들이 초등학교 때까지는 함께 갔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동행을 꺼려 강권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손자가 그 뒤를 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땐 장난감을 챙겨가서는 혼자 잘 논다. 그 사이 한증막에 들러 땀을 빼고 샤워를 한 뒤 손자를 씻겨준다. 함께 살던 아들이 분가한 뒤에는 다시 혼자서 간다.
우리 동네 목욕탕은 옛날식이다. 온탕과 냉탕 혼자 들어갈 수 있는 전자 안마탕이 전부다. 한증막도 2∼3명이 앉을 정도로 좁다. 물을 떠서 몸을 씻는 작은 욕조가 가운데 있다. 요즘 시골에서도 이런 구조는 드물다. 나이 탓인지 오히려 대형 사우나보다 정감이 가고 편안하다. 코로나 발생 이후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간다. 목욕탕 문을 여는 이른 시간에 들어가 독탕처럼 느긋하게 즐긴다.
코로나 2년 동안 동네 목욕탕 5곳 중 1곳이 사라졌다는 보도다. 전기, 수도, 가스비 등 고정 운영비가 늘고 손님이 급격히 줄어든 탓이다. 방역 패스 도입도 직격탄이 됐다. 단골 대부분이 고령층인데다 QR 체크를 할 수 없어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다는 것. 재래시장 안에 자리 잡은 우리 동네 목욕탕이라도 오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다.
성경의 역사를 간직한 땅 터키 에페소스에도 대목욕장 건물 형체가 남아 있다. 지진으로 파괴된 목욕장을 BC 4세기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10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대목욕장에는 온탕, 냉탕, 사우나, 휴게실, 체육시설까지 갖췄다고 한다. 인근 공중화장실은 수세식이다. 홈통 아래로 떨어진 오물은 목욕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씻겨 내려간다. 귀족용은 대리석이다. 좌변에 앉아 그 시절을 상상해 본다. 로마제국의 목욕 문화는 사치와 향락으로 타락을 자초했고 망하는 단초가 됐다.
우리나라 목욕탕은 일제강점기 때 태동했다. 일본인들과 선교사들이 드나들면서 서양인을 상대로 욕실을 부대시설로 갖춘 호텔과 여관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발전의 계기가 됐다. 근대적 형태의 대중목욕탕은 1924년 평양에서 첫선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행정관청인 부(府)에서 관리를 맡았다. 서울에서는 이듬해 첫 대중목욕탕이 문을 열었고, 광복 이후 빠르게 늘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땐 거의 매일 목욕탕에 들리는 마니아였다. 새벽에 출근하여 전쟁을 치르듯 신문 1판을 마감하고 나면 피로가 밀물져 온다. 지방판 제작까지는 서너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 그 짬을 활용하여 목욕탕에 들러 땀을 흠뻑 빼고 나면 심신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면서 에너지가 충전된다.
일요일엔 동네 목욕탕엘 들린다. 혼자 가는 경우가 많지만 아들이 초등학교 때까지는 함께 갔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동행을 꺼려 강권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손자가 그 뒤를 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땐 장난감을 챙겨가서는 혼자 잘 논다. 그 사이 한증막에 들러 땀을 빼고 샤워를 한 뒤 손자를 씻겨준다. 함께 살던 아들이 분가한 뒤에는 다시 혼자서 간다.
우리 동네 목욕탕은 옛날식이다. 온탕과 냉탕 혼자 들어갈 수 있는 전자 안마탕이 전부다. 한증막도 2∼3명이 앉을 정도로 좁다. 물을 떠서 몸을 씻는 작은 욕조가 가운데 있다. 요즘 시골에서도 이런 구조는 드물다. 나이 탓인지 오히려 대형 사우나보다 정감이 가고 편안하다. 코로나 발생 이후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간다. 목욕탕 문을 여는 이른 시간에 들어가 독탕처럼 느긋하게 즐긴다.
코로나 2년 동안 동네 목욕탕 5곳 중 1곳이 사라졌다는 보도다. 전기, 수도, 가스비 등 고정 운영비가 늘고 손님이 급격히 줄어든 탓이다. 방역 패스 도입도 직격탄이 됐다. 단골 대부분이 고령층인데다 QR 체크를 할 수 없어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다는 것. 재래시장 안에 자리 잡은 우리 동네 목욕탕이라도 오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