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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교수님] 죽은 자가 산자를 죽이는 비극

[강판권 교수님] 죽은 자가 산자를 죽이는 비극

by 강판권 교수님 2022.01.24

인간은 죽은 자를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무덤은 인간이 죽은 자를 기념하는 상징물이다. 대부분 무덤은 인간의 조상이다. 우리나라 무덤 중에는 죽은 사람 외에 태를 묻은 무덤도 있다. 그중 왕족의 태반(胎盤)을 묻은 곳을 태실(胎室)이라 부른다. 전국 곳곳에는 태실이 적지 않지만, 조선왕조 세종의 아들의 태를 묻은 경상북도 성주군의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태실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서진산(棲鎭山) 태실에는 조선 왕실 13위의 태실이 묻혀있다.
왕족의 태실은 장차 왕에 오를 가능성 때문에 태실이 묻힐 장소 선정을 비롯해서 태를 태실까지 봉송하는 절차와 봉안하는 의식도 무척 까다롭다. 왕족의 태와 관련한 기본적인 일은 관상감(觀象監)이 설계하고, 태를 운반하는 과정과 장소 마련은 선공감(繕工監)이 담당한다. 태실의 중요성은 태를 봉송하는 날에 당상관(堂上官)으로 안태사(安胎使)를, 태실을 조성하는 책임자는 당하관으로 감동관(監董官)을 뽑은 데서 알 수 있다. 당상관은 조선시대 정3품 이상을 의미한다.
태실은 만든 후에도 엄격하게 관리했다. 태실을 만든 후 각종 제례(祭禮)를 치르는 것은 물론 태실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ㆍ벌목ㆍ개간ㆍ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관할 구역의 관원은 봄과 가을로 태실을 순행해 이상 유무를 확인한 뒤 보고해야만 했다. 만약 태실을 고의로 훼손했거나 벌목ㆍ채석ㆍ개간 등의 경우에는 국법에 의해 엄벌했다. 태실에 대한 이 같은 규정은 조선시대 소나무 보호 정책과 아주 비슷하다.
성주군에서는 코로나19 이전까지 태실과 관련한 의식 행사를 중요한 사업으로 추진했다. 그런데 얼마 전 현장에 가보니 태실 주변의 소나무 숲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곳 해설사에게 물어보니, 송진이 태실에 떨어져 문화재를 훼손하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했다. 도대체 문화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태실 주변의 소나무를 베어버렸단 말인가. 조선의 법령에 태실 주변의 나무를 베면 엄벌한 규정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태실은 울창한 소나무 덕분에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곳의 소나무는 수십 년에서 백 년 이상의 소나무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태실 주변의 소나무는 태실과 함께 중요한 문화재이다.
만약 송진이 태실에 떨어진다면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다. 그런데도 주변의 소나무를 싹둑 잘라버린 것은 만행이다. 조선시대 죽은 자의 태실을 보존하기 위해 살아 있는 소나무를 제거한 것은 비극이다. 더욱이 성주군에서 추진한 태실 관련 행사는 ‘생명’이라는 콘텐츠라는 점을 인정받아 2021년 ‘문화재청장상’까지 받았다. 성주군에서는 세종대왕자태실을 통해 임산부나 예비 임산부를 대상으로 태교 여행 기회를 제공하는 등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울 수 있는 체험형 사업이라 홍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수목문화(樹木文化)’의 상징인 소나무를 제거하면서 진행하는 행사는 지자체의 문화재 보호에 대한 이중성과 천박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살아 있는 소나무를 죽이고서도 뻔뻔스럽게 생명의 소중함을 주장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