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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작가님] 겨울숲

[권영상 작가님] 겨울숲

by 권영상 작가님 2022.01.27

겨울이 깊어가는 만큼 날도 점점 추워진다.
암만 삼동이어도 겨울이란 본디 춥고 매운 법이지, 하면 그 순간 몸도 마음도 좀 누그러진다. 옷을 단단히 입고 집을 벗어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동네 산에 산책 삼아 오른다.
산은 언제 올라도 좋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좋다. 여름산의 나무숲은 초록 덩어리다. 그런데도 여름산이 좋은 건 ‘모두 초록’인 그 단순함 때문이다. 작은 생명들은 그 단순한 초록에 몸을 숨기고 살 수 있어 생존이 덜 힘들다.
그런가 하면 겨울산의 숲은 속살을 다 드러낸다.
모두 버리고 헐벗은 탓에 나무 저 자신도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도 허전하다. 텅 비어있다. 솔직히 나무와 나무 사이가 너무 멀다. 여름날에 본, 간극 하나 없을 것 같던 친밀감이 마치 매정한 날의 거리처럼 그 사이가 너무 멀고 차다.
겨울산의 숲은 그래서 더욱 허전하다.
그게 겨울산으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는 이유일 수도 있다.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막상 전화 한통 걸고 싶을 때 걸 수 없는 자신처럼 허전한 게 겨울산에 외로이 선 나무들이다.
그렇다고 겨울 산이 허전하기만 한 건 아니다. 여름날에 보지 못하던 작은 생명들과의 만남의 기쁨도 그 허전한 자리가 있어 가능하다.
산에 들어서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를 건너뛰는 청설모가 있다.
솔씨를 까먹느라 부리짓하는 솔새들이 있고, 마른 풀을 뒤지는 박새며 곤줄박이가 있다. 그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 허전한 거리를 이어주거나 채워주거나 메워준다.
잣나무 언덕을 넘어설 때다. 그쪽 양지바른 둔덕에 난 찔레덤불이 유난히 바스락댄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도 있는 것 같은 기척이 있어 유심히 본다. 오목눈이 새들이다. 엄지손가락만 한 오목눈이들이 찔레덤불 안에서 노느라 바쁘다. 빨갛게 익은 찔레열매를 콕콕 쪼아 맛을 보며 겨울 햇살 목욕을 한다. 작은 것들에게 안전한 곳은 덩치 큰 새들이 덤벼들지 못하는 헝클어진 가시덤불 속이다. 잠깐이어도 이런 곳은 오목눈이들에게 천국이다. 햇살이 자리를 옮기면 햇살을 따라가느라 오종종종 바쁘다.
그들을 두고 고즈넉한 산비탈을 걸어 오를 때다.
어디선가 바스락! 한다. 한순간 적막감이 돈다. 저쪽이다. 빈 참나무 숲 아래에 서 있는 까치다. 까치가 가랑잎에 발을 떼어놓다가 바스락, 하는 제 발소리에 놀라 발을 옮기지도 못하고 이쪽의 나를 보고 서 있다. 까치와 내 눈이 마주친다. 안전한 거리감 때문인지 까치가 슬며시 발을 떼어놓으며 나무둥치 뒤로 숨는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까치의 긴장감을 풀어주려고 그만 눈길을 거두어들인다.
그렇게 걷다 보면 금세 산 중턱이다.
저쪽 길로 붉은 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무숲 사이로 보이고,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릴 만큼 겨울숲은 열려있다. 산 아래 어느 골목을 도는 야채장수의 스피커 소리도 또렷이 들려온다. 허전한 겨울 산이 아니면 눈에 띄지 않았을 아카시나무 우듬지의 덩그런 까치집도 가까이 보인다.
겨울의 숲은 허전하여서 선뜻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것에 눈길이 가는 계절이다. 그들이 있어 허전한 산이 또 나름대로 채워지고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