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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정릉천을 걷다

[한희철 목사님] 정릉천을 걷다

by 한희철 목사님 2022.02.16

등 뒤로 북한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정릉에는 정릉천이 흐릅니다. 북한산이 머금었던 물이어서 그럴까요, 동네 한복판을 흐르는 물은 한눈에 보기에도 맑고 깨끗합니다. 크고 작은 바위틈을 따라 흘러가는 물은 물소리조차 맑고, 흐르는 물을 따라서 난 산책로에는 길을 걷는 사람들의 걸음이 또 하나의 개울처럼 흘러갑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에 한 번 정릉천을 걷습니다. 대개는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저녁을 먹고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섭니다. 아직은 해가 충분히 길지 않아 어둠 속을 걷지만,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어둠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길 곳곳에 가로등과 안전등이 켜 있기 때문입니다. 불빛을 따라 걷는 것은 환한 낮 시간과는 사뭇 다른 운치가 있습니다. 정릉천 가에 있는 한 사찰에서 저녁 종을 치면 종소리는 더없는 그윽함으로 다가옵니다.
정릉천을 따라 걷다 보면 청둥오리들과 왜가리 등의 새를 만납니다. 두 마리 혹은 서너 마리씩 무리를 지은 청둥오리들과,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는 흰색 왜가리 두 마리가 눈에 띕니다. 어디 색깔 때문일까 싶으면서도 잿빛 왜가리가 늘 혼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외로움 때문이라면 벌써 쓰러졌지 싶은 잿빛 왜가리가 혼자서도 꿋꿋한 걸 보면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새들은 모두 물에 발을 담근 채 밤을 맞습니다. 곳곳에 얼음이 얼어 있고, 얼음 사이를 흘러온 물이니 얼마나 찰까 싶은데도 맨발의 새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을 떠나지 않습니다. 물 가장자리에 있는 갈대와 검불이 얼마든지 더 따뜻하겠다 싶은데도 새들에겐 물이 더 편한가 봅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그럴듯해도 그것이 모두 옳은 것일 수는 없으니까요.
언제부턴가 정릉천에서 수심이 그중 깊지 싶은 다리 근처에는 빨간색 금붕어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정릉천의 깨끗함을 대변하는 버들치라면 모를까 금붕어는 영 어색했습니다. 물고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금붕어가 얼음물 흘러가는 정릉천을 견딜 수 있을까 싶어 그곳을 지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금붕어를 찾고는 했지요.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했는데, 용케 겨울을 난다 싶었던 금붕어가 얼마 전부터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정릉천을 걷다 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비닐봉투를 비롯한 쓰레기들이 곳곳에 눈에 띕니다. 누군가 슬그머니 버린 것들도 있겠지만, 어쩌면 바람에 날려 온 것들일지도 모릅니다. 얼음이 녹을 즈음 아는 이들과 마음을 모아 정릉천을 청소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장화를 신고 집개를 들고 버려진 쓰레기를 모아 치우면 물소리는 얼마나 더 맑아질까, 정릉천을 바라보는 이웃들의 마음은 얼마나 더 깨끗해질까, 벌써부터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세계 여러 도시를 둘러본 뒤에 남긴 신영복 선생 글에 의하면, 힘 있는 도시란 시민 수가 많거나 예산이 많은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애정을 바칠 수 있는 도시’가 강한 도시였습니다.
정릉에 사는 나는 정릉천을 걸으며 정릉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내 사는 곳의 개울 하나 산 하나를 사랑한다면 어느새 이 나라는 어디를 가나 자부심 가득한 나라가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