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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작가님] 산에서 찔떡, 미끄러지다

[권영상 작가님] 산에서 찔떡, 미끄러지다

by 권영상 작가님 2022.03.17

산에서 내려오다가 찔떡, 미끄러졌다.
모든 게 내 부주의 탓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날이 풀렸다는 점이다. 대체로 아침 일찍 산에 올랐는데 오늘은 조금 늦었다. 조금 늦은 만큼 얼었던 산길이 서서히 녹은 모양이다. 보기에도 산길이 녹느라 햇빛에 번질번질하다.
늘 아침 일찍 오르고, 또 언 길을 조심성 없이 걷던 습관이 있어 물컹한 길을 헛디뎌 그만 찔떡, 미끄러졌다. 그래도 재빨리 양손을 뒤로 짚는 바람에 손은 비록 물크러진 흙을 짚었지만 엉덩이가 진흙 바닥에 철버덕 주저앉는 것만은 피했다.
간신히 일어나 흙투성이 손을 닦고 조심조심 내려오다가 보니 미끄러질만한 곳에 누군가가 낙엽을 뿌려놓았다. 어디든 디디면 진흙에 신발이 물씬 빠지지만 그래도 낙엽 위만은 미끄러움이 훨씬 덜하다. 앞서 간 누군가가 뒤에 올 사람을 위해 뿌려놓은 듯하다.
그의 손길이 새삼 고맙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뒷사람을 위해 이런 일을 한 그분은 누굴까. 그는 어떤 분이길래 제 한 몸은 물론 다음 사람들의 산행까지 염려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이런 곳에서 얼핏 든다. 그 까닭은 남을 위한 그런 세심함이 내게는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인 듯하다.
눈 내린 산길을 오를 때도 가끔 나를 감동시키는 착한 손길을 만난다.
가파르거나 미끄러운 눈길 앞에 서 보면 앞서 간 분의 배려의 손길이 보인다. 길옆 낙엽 더미를 헤쳐 낙엽을 눈 위에 뿌리거나 헤쳐낸 산흙을 뿌려놓은 걸 볼 때면 나는 감동한다. 그의 머릿속은 대체 얼마나 착하고, 그의 손은 대체 얼마나 고마운가.
나는 여태 그런 길을 만나면 길섶 낙엽이나 마른 풀을 밟으며 그저 내 한 몸 올랐으면 말지, 뒷사람을 염려하거나 배려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여름 장마철에도 그런 곱상스러운 풍경을 나는 간혹 만난다.
산비탈 경사도가 낮은 곳에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빗물이 갈 길을 몰라 모여든다. 그런 흥건한 곳이면 나는 발을 세워 겅중겅중 뛴다. 그것도 아니면 물기가 적은 데를 찾아 빙 돌아간다. 그러나 가끔 만나는 풍경은 다르다. 흥건한 물쿵뎅이 길에 밟고 지나가기 좋도록 드문드문 놓여진 징검돌이 있다. 나는 그 곱상스런 풍경 앞에서 아! 하고 감탄한다.
대체 누가 징검돌들을 이렇게 놓아두고 갈 생각을 했을까. 곱상한 풍경을 넘어 그게 신비롭기까지 하다. 산이라고 아무 데나 딛고 갈만한 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어디선가 돌을 찾아내어 신발 젖지 말라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놓고 갔다. 건널 때는 모르지만 다 건너고 나면 그분 손길의 고마움을 느낀다.
살다 보면 누구나 궂은 길에서 발을 적시고, 어느 위태로운 언덕에서 찔떡, 미끄러지는 위기에 처할 때가 있다. 입사 시험에서 외로이 낙방하거나, 승진의 고비에서 좌절하거나, 친구와의 오랜 우정이 깨뜨려지거나,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할 때, 우리는 찔떡, 미끄러지는 좌절과 낙담을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손을 잡아준 분이 돌아보면 다들 있다.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인생의 험로에서 미끄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고교 입학을 못한 채 3년을 허송세월하고 있을 때, 내 손을 잡아 일으켜준 그분은 내게도 있다. 미끄러워진 언덕길에 낙엽을 뿌려주고, 물쿵뎅이 길에 징검돌을 놓아주던 그 세심한 분을 오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