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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님] 여우섬의 일출

[한희철 목사님] 여우섬의 일출

by 한희철 목사님 2022.03.23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소위 명소라고 알려진 곳이 있습니다.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한 최선의 장소 말이지요. 명소 이야기를 한다고 사진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어서,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로부터 종종 들었던 이야기일 뿐입니다.
바위 사이로 동강할미꽃이 피는 곳, 자작나무 연초록 잎이 파스텔 풍으로 춤추는 곳, 보름달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 철새들의 군무가 장관인 곳, 꽃무릇이 비단처럼 펼쳐지는 곳, 단풍이 유난히 붉고 아름다운 곳, 상고대가 눈부신 겨울꽃처럼 피어나는 곳, 따로 수첩을 뒤지지 않아도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언제쯤이 절정의 시간인지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일출을 찍기 위한 명소로 알려졌다는 여우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입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남한강이 흘러가는 강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입니다. 그 길을 여러 번 지나다니면서도 그곳이 일출 사진의 명소라는 것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었으니까요.
가까이 지내는 지인 중에 사진을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다. 남편은 사진을 찍고, 아내는 시를 써서 연말이 되면 달력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전합니다. 남편이 찍은 사진 옆에 아내의 시가 들어가니, 세상에 둘도 없는 달력이 됩니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우섬으로 사진을 찍으러 가려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전화였습니다. 다음날 예보를 보니 날씨가 좋아 일출 사진을 찍기에 제격일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전화를 한 시간은 저녁, 그럼에도 가겠다고 대답을 한 것은 다음날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보다는 그런 가벼운 초대가 흔쾌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여우섬까지는 두 시간 거리입니다. 일곱 시 일출에 맞추려니 한창 새벽에 떠나야 했습니다. 어둠 속을 달리며 이런 날 없었지 싶은 기가 막힌 일출이었으면 좋겠다는, 동백꽃 붉음이 가슴까지 물들이는 빛깔이면 좋겠다는, 그래서 불쑥 찾은 서로에게 잊히지 않을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지나갔습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여우섬엔 인천에서 왔다는 젊은 청년이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편 해가 떠오를 산 위론 구름이 가득하여 구름 속으로 붉은빛이 번지면 얼마나 황홀할까 기대를 하는데 아뿔싸, 일출 시간이 지나가는데도 구름은 전혀 달라지지가 않았습니다. 일출 시간으로부터 이삼십 분이 지나도 무엇 하나 달라지는 게 없었지요.
결국은 백기를 들 듯 사진 한 장 못 찍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황으로 보자면 아쉽거나 서운해야 할 텐데 이상하리만치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새벽길을 설렘으로 달려왔다가 사진 한 장을 못 찍고 돌아서는 그 일이 마음속 즐거운 기억으로 남겠다 싶었습니다. 돌아서서 달리는 자동차의 백미러에 뒤늦게 떠오른 해가 놀리듯 나타났을 때도 얼마든지 웃으며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뜻대로 되지 않은 시간이 외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