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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님] 젤렌스키의 결기

[이규섭 시인님] 젤렌스키의 결기

by 이규섭 시인님 2022.03.25

전쟁은 참혹하다. 러시아군의 포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6세 여자아이가 한 병원으로 실려 왔다. 소녀를 안은 아버지의 얼굴과 손은 피로 얼룩졌다. 의료진의 응급 수술에도 소녀는 결국 숨을 거둔다. 현장에 있던 의료진은 취재진 카메라를 향해 외친다. “푸틴에게 아이의 눈빛과 울고 있는 의사들의 눈을 보여주라!”고. 딸에게 모자를 씌우고 전쟁터로 떠나는 아버지, 홀로 울면서 국경을 넘는 소년, 피난 열차에 가족을 보내고 전쟁터에 남는 이산의 아픔 등 전쟁이 평온한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러시아군은 유치원과 산부인과 병원 등 민간인 지역에도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면서 우려했던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피난길을 열어준다는 휴전 약속마저 무시하고 공격하여 인도주의 통로마저 아수라장이 됐다.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하는 건 국제사회가 책임을 물어야 할 전쟁범죄다. 난민도 1천만 명에 육박한다.
전쟁은 러시아의 일방적 승리로 쉽게 끝날 줄 알았다. 러시아 공군이 대대적 공습을 퍼붓는다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는 순식간에 함락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는 의외로 강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사항쟁의 전의를 불태우게 만든 원동력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결기다. 미국에서 항공편을 제시하자 “탈출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내가 여기 있다”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며 SNS를 통해 수시로 근황을 알리며 국민들을 독려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고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나라별 ‘맞춤형 연설’로 지지 여론을 끌어내는 외교력은 푸틴의 총보다 강하다는 평가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찰리 채플린이 윈스턴 처칠로 변모했다’고 극찬했다.
젤렌스키에겐 유대인의 피가 흐른다. 그는 1978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 희생자다. 아버지는 컴퓨터공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공학자다. 젤렌스키는 어려서부터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남을 웃기는 재주가 탁월했다. 1997년 코미디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주목받는 코미디언이 됐다. 명문 키이우 국립경제대학에서 경제학 학사와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건 2015년부터 방영된 ‘국민의 종’이라는 51부작 대하드라마다. 제작자 겸 주연인 젤렌스키는 고등학교 역사교사 역할을 맡아 학생들 앞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성토한다. 대통령이 되어 부패 정치인들을 몰아낸다는 게 드라마 줄거리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2019년 드라마는 현실이 됐다. 대선에 출마한 그는 현직 대통령보다 3배 가까운 표차로 당선됐다. 41세 최연소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나는 평생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해왔다. 이제 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최소한 울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포부를 밝혔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나라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 세 독재 정권과 인접해 긴장이 도사린다. 자강(自强) 하지 않으면 위기 때 자멸(自滅) 하는 건 자명(子明) 하다. 지도자의 결기가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