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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작가님] 봄비와 살구나무

[권영상 작가님] 봄비와 살구나무

by 권영상 작가님 2022.03.31

간밤에 봄비가 왔다.
봄비치고 풍족하게 왔다. 여름비도 좋고, 가을비도 좋지만 비 중에 봄비만큼 좋은 비가 있을까. 봄비는 잠든 풀씨를 깨운다. 그리고 그들을 환한 햇빛 세상으로 이끌어 들인다. 무엇보다 봄비가 하는 가장 놀라운 일은 대지를 푸른빛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이다. 아이들 말로 하자면 요술비가 봄비다.
봄비 그친 뜰에 나선다.
매화도 피고 산수유도 피었다. 건너편 산자락에 드문드문 선 생강나무도 오래전부터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봄은 봄비가 오기 전부터 이미 와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봄을 느끼지 못한 채 머뭇거린다. 매화나 산수유 꽃만으로 선뜻 봄이 왔구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봄이 봄이 되려면 적어도 마을에 살구꽃이 피어야 봄이다.
살구꽃이 피어야 고즈넉하던 마을이 훌훌 털고 살아난다. 살구꽃이 피어야 골목길에 온기가 돌고, 사람들 목소리에 봄물이 오른다. 살구꽃이 피어야 주고받는 말마디에 살갑고 따스한 정이 돈다. 살구나무 살구꽃 핀 한낮쯤 수탉이 한 놈 길게 목을 뽑아 운다. 그건 모진 겨울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간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부엌에선 점심 그릇 부딪는 소리가 나고, 밥 먹고 나가 놀아라! 하는 엄마 목소리가 난다. 아이들은 숟가락을 빼면 운동화 끈을 조인다. 겨우내 머물던 좁은 방안이 답답하다. 아이들은 들판을 내달린다. 도랑둑을 만나면 도랑둑을 달리고, 버들 숲을 만나면 호드기를 만들어 분다. 그도 싫증 나면 도랑이 끝나는 곳에서 갯물을 만나고, 그 갯물 끝에서 이웃 동네 파란 바다를 만난다.
바다! 봄비 내린 봄바다는 잔잔한 들판 같다.
봄바다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모래톱을 찰싹이며 어리광을 부린다. 모래톱을 따라 걷는다. 걷다가 껑충 뛴다. 뛰다가 힘껏 달린다. 달리다가 숨차면 파도에 밀려온 조개를 줍는다. 겨울이 떠나간 봄바다엔 두고 간 꿈처럼 조개껍데기들도 많다. 짝지은 대합이 있다. 빨간 가리비가 있고, 낮별 같은 불가사리, 파도에 깨어진 명주조개, 구멍 하나 동그랗게 뚫린 참조개, 허리를 더 숙여야 보이는 소라와 작은 골뱅이들.
바다를 향해 조약돌을 던지고 돌아온 날, 누나는 바다 냄새가 나는 내게 묻는다. 바다에 봄이 왔든? 하고. 바다에 봄이 오면 봄미역이 파도에 밀려나온다. 그때가 살구꽃 필 무렵이다. 아직도 내마음 속 봄엔 살구꽃이 붉게 핀다.
모과나무 모과잎이 파릇이 나오고, 목련이 부리를 열고 꽃을 피운단들 내 마음의 봄은 살구나무를 향한다. 뜰 안 살구나무 가지가 끝끝이 우련히 붉다. 밤새도록 풍족히 비가 내렸으니 이제 하루 이틀 지나면 그 꽃망울이 터지겠다.
살구꽃 피면 살구꽃 보며 소주 한잔 하자던 동향 친구가 생각난다.
근데 그 친구가 엊그제 오미크론에 감염되어 독방 신세를 지고 있다. 버스를 타고 서점에 가 책 한 권 사가지고 온 것뿐인데 밤새도록 목이 붓고 아프더니 기어코 양성 판정이 나왔단다. 격리 기간이 일주일이라지만 살구꽃 폈다고 내처 만나는 것도 좀 그렇다. 열흘이 지나거나 두 주일쯤 지나야 마음 놓고 마주 앉을 수 있지 않을까.
살구꽃 피면 봄이 올 줄 알았는데 우리들 마음의 봄은 아직 저만치 서 있다. 소주도 소주지만 세상이 얼른 씻은 듯이 깨끗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