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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의 성지(聖地), 충북 오송 봉산리 옹기가마

옹기의 성지(聖地), 충북 오송 봉산리 옹기가마

by 청주교차로 이승민 2014.07.09

청원의 한 촌놈, 전국에서 뚝배기 제일 잘 만들어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박재환 (83)옹기장(충북 오송 봉산리 옹기가마 043-238-5386)

지난, 2010년 울산 세계옹기문화엑스포에서 점촌마을 옹기가마에서 불을 지펴 엑스포 성화불로 옮기는 모습이 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80세의 노익장을 이끌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옹기를 구워내듯 들어 올리듯 불을 들어 올리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박재환 (83)옹기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7대째 옹기를 굽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가마도 200년 가까이 됐다. 하지만 옹기 전수자인 박성일씨에 따르면 “가마는 그 이전부터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어쩌면 더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우리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라고 말한다.
옹기는 삼국시대부터 만들어 왔으며 세계에서 한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음식 저장용 그릇이다. 지금도 손수 흙을 다져 옹기를 만들고 있는 장인의 옹기에 대한 가치는 분명 다르다. 그런데 이 옹기가마가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일대가 오송 제2생명과학단지로 지정되는 바람에 가마터 역시 아파트 부지로 수용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옹기 전수자인 박성일씨는 “충북개발공사는 우리 민족문화유산인 옹기 가마터를 밀어버리고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려고 한다. 이게 주민과 지역의 미래를 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옹기터인 이곳은 명당성동보다 더 오래된 천주교 공소가 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옹기는 천주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옹기장은 독과 항아리 등을 만드는 장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옹기장이 만든 옹기는 한민족이 다함께 애용해 왔으며 앞으로도 애용되어야 할 생활용기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계승되어 왔고, 외래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용기이기도 하다. 본래 옹기는 그 쓰임새를 정해 놓고 만들었다기보다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쓰였다.
청자나 백자는 장식적인 그릇인 반면 옹기는 실용적인 그릇이었다. 주거 공간의 배치에 따라 옹기는 부엌·곳간·장독대 등에 놓이는데, 대개 쓰임새가 그 놓여 진 공간의 용도와 일치하게 된다. 그 쓰임새에 따라 대개 보관용, 운반용, 제조용, 생활용, 민간신앙용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보관용(저장용) 옹기는 발효식품을 저장해 두는 식생활 용기로, 농경사회에서 곡식이나 씨앗을 보관하는 용기로 적합했다.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의 장류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김치를 저장하는데 필요한 항아리와 쌀독, 물독, 씨앗단지 등이 있으며, 양념단지, 간장병, 술병, 수저통, 주전자, 푼주 등이 있다.
운반용 옹기는 집안에서 밖으로, 또는 집 밖에서 안으로 무언가를 운반할 때에 필요한 옹기였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나르던 동이나 술을 담아 운반했던 술병, 물이나 술, 분뇨 등을 담아 운반했던 물장군, 술장군, 오줌장군, 똥장군 등이 있다. 물이 귀한 제주도에서는 물을 길어 운반했던 허벅이 있다.
옹기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한국의 전통음식문화와 호흡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각 지역마다 고유의 지역적 방식으로 옹기가 생산되고, 19세기부터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교인들이 시골로 피신하여 옹기장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옹기는 천주교의 전교와 깊숙하게 연결되면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봉산리 옹기점, 1890년 천주교 공소 자리로 역사적 가치
천주교 교리는 조선의 성리학적 사회규범과 완전히 다른 사상이므로 천주교를 신봉하는 일은 문중이나, 마을에서 퇴출당하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천주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인적이 드문 벽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 봉산리 교유촌도 200여년 전 박재환 옹기장의 6대조 박예진도 천주교 세례를 받고 문중에서 퇴출당했다. 박예진은 할 수 없이 식솔들을 이끌고 청원군 봉산리 일대로 숨어와 옹기를 굽기 시작했던 것이다. 봉산리 일대는 외부와 차단된 곳이기도 했고 인근에서 점토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천혜의 장소여서 그들이 거주하게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향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100여 세대를 이루어 봉산리 교우촌을 일구었던 것이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자 4년 후인 1890년 불란서 선교사들이 봉산리 옹기공장 한쪽에 약50평 규모의 공소를 짓고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후에는 청주교구 노기남 대주교(한국 최초의 대주교)가 한 달에 한 번 3일간 성사예식을 치르기도 했다. 이곳 공소에서는 주변의 강내, 전의, 조치원 등에서 보통 200~300명의 신도들이 모였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1960년 옛 봉산리 점촌마을 공소자리에 옹기점을 건립되었다.
200여 년 전에 6대조 박예진이 봉산리 점촌마을로 들어와 옹기를 굽기 시작한 이래, 6대손 박재환(83) 옹기장은 두 아들과 함께 지금까지 옹기를 굽고 있다.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박재환은 어린 나이에 가업을 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노력 끝에 옹기에 관한한 전국 최고의 옹기장이가 되었다. 2003년도는 마침내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 12호로 옹기장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옹기장이 아버지 박원규는 선대로부터 천주교 신자였다. 그런데 1941년 아버지가 일본탄광으로 끌려가 폭약이 터져 왼쪽 발목이 절단됐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물레를 돌릴 수 없었고, 옹기도 팔러 다닐 수도 없었다. 낙담했던 아버지가 이듬해 돌아가셨다. 아버지 박원규는 어린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때가 되면 누구나 죽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하느님 세상은 영원하다. 먼저 가니, 훗날 하느님 나라로 오거라.”

어머니는 2배 이상의 값은 받지 않아
박재환 옹의 5대조부 유작, 6대조부 유작, 7대조부 유작, 부친 유작(위로부터 시계방향)

“사기장사는 4배가 남고, 옹기장사는 5배가 남고, 유기장사는 6배가 남는다.”
옹기장사가 그만큼 이문이 좋다는 의미다. 하지만 박재환의 어머니는 ‘하느님께 죄 짓는 일’이라며 절대 2배 이상의 값을 받지 않았다. 어린 박재환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옹기공장에 취업했다. 이미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던 두 살 터울의 형과 함께 온갖 잡일을 도맡았다. 취업한지 한 달 만에 쌀값 두말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 옹기 공장에서 처음 받은 그 돈으로 된장, 간장을 샀다. 그의 나이 11살이었다.
박재환이 옹기공장에서 일은 한 지 3년 째, 비로소 옹기 뚜껑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너무 좋아 남들은 놀 때, 밤을 새워 뚜껑을 만들어보았다. 이를 눈여겨 본, 아버지의 옛 지인이었던 박노성씨는 “누구에게 기술을 배우기보다는 본인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수없이 옹기를 어깨너머로 익히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똥장군’을 번듯하게 만들어 냈다. 똥장군은 숙련된 옹기장도 쉽지 않은 분야였다. 흙을 조금씩 쌓이 올려 형태를 꾸미고, 또 두드리고, 또 온몸을 비틀어가며 주둥이를 만들어야 하는 어려운 기술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똥장군’을 만드는 데 10년이 걸렸지만, 박재환은 4~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남들보다 손놀림도 빨랐다. 남들이 하루에 30개를 만들 때, 그는 40여개를 넘겨 만들어 냈다.
월급이 쌀 두 말에서 두 가마니로 올랐다. 더구나 도전정신도 남달라서 방앗간 기계를 보고 색다른 물레를 손수 제작해 남들이 하루에 뚝배기 50개를 만들 때, 그는 70여개를 뚝딱 만들어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청원의 한 촌놈이 전국에서 뚝배기를 제일 잘 만든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에는 일류도공의 잣대가 ‘양조장 막걸리 400ml를 담는 옹기단지를 누가 더 많이, 누가 더 잘 만드느냐?’였다. 박재환은 소위 일류도공이라고 소문난 사람을 찾아가 시합을 청했다. 그때 일류 옹기장이가 7개를 만들었지만, 박재환은 열 개를 만들어 보였다. 그 이후, 박재환의 이름 앞에는 ‘일류 옹기장’이란 별칭이 따라다녔다.

옹기고수를 찾아 팔도유람, 최고에 오르다
‘아내에게 옹기를 만지지 않게 하겠다.’
그것은 박재환이 결혼당시 자신과 약속한 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최고의 옹기장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결혼한 지 2년 후, 그는 전국 각지로 옹기 고수들을 찾아 나섰다. 1958년에 보은 송평리 옹기공장에서는 가마 온도를 통해 옹기를 절대로 깨뜨리지 않는 비법을 전수받았다. 도공사이에서는 그것은 ‘비법 중의 비법’이었다. 하지만 박재환의 성실함과 열정에 탄복한 나머지 ‘600~700도 사이에서 오래도록 불을 때면 옹기가 절대 깨지지 않는다.’는 비법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 이듬해부터는 3년 동안 경기도 용인 삼계리 옹기공장에서 흙 다루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곳에는 흙 다루는 데는 일품이라고 소문 난 두 형제가 있었다. 박재환은 무작정 그들을 찾아가 기술 전수를 부탁하며 삼고초려를 했다. 박재환의 정성이 마음이 움직인 두 형제는 ‘좋은 점토를 고르고, 풀어 거르고, 건조시켜 불순물을 빼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또한 1961년부터는 5년간 안성 양협리 옹기공장에서 큰 단지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당시 양협리 옹기공장은 1960~1970년대까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인근 100세대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50여 명의 일류 도공들이 이주, 정착해 옹기를 제작했다. 전국에서 팔리는 대부분의 옹기들이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그런데 양협리 옹기 공장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물동이를 만드는 것’을 통과해야 했는데, 박재환이 만든 물동이를 보더니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다. 박재환은 주로 큰 단지를 만들었다. 기술이 숙련되어질 무렵, 박재환은 단지에 독창적인 붕어를 그려 넣었다. 붕어가 그려진 큰 단지는 일종의 파격이었으며, 혁명이었다.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옹기장이 박재환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1967년부터 2년간 연기 용담리 옹기 공장에서 기름으로 불 때는 기술도 전수받았다. 하지만 신식 가마는 재래식 가마에 비해 옹기를 손쉽게 구울 수 있었지만, 그가 꿈꿔온 옹기는 아니었다. 그는 결국 재래식 가마에서 다시 해답을 찾아 나섰다. 1969년부터 전국에서 가장 큰 가마가 있는 인천 경서동 옹기공장으로 옮겼다. 한 번 불을 때면 6톤 트럭 20대 분량의 옹기가 쏟아져 나올 만큼 규모가 대단했다. 그는 엄청난 규모에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때 최기영 사장이 위로를 했다.
“당신이 체격은 작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옹기장이다.”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큰 가마를 너끈히 다스렸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전국의 고수들에게 온갖 옹기제작기술을 한 몸에 전수받고, 1971년도에 고향으로 돌아와 현재의 청원군 봉산리로 돌아와 선대들이 일해 왔던 옹기공장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고수들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칸칸마다 불이 잘 돌도록 200년 된 옛 가마를 수선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후, 마침내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으로 지정이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전통옹기를 세상에 알리는 홍보대사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오송 봉산리 옹기가마의 맥을 이어갈 전수자는 셋재아들인 박성일 씨와 박재환 옹기장

■ 취재.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 사진. 이승민 기자 iuns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