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사진사가 되고 싶어요" 행복한 사진관 윤석용 실장
"행복을 전하는 사진사가 되고 싶어요" 행복한 사진관 윤석용 실장
by 대구교차로 '앳잡' 손일수 기자 2014.06.10
아버님이 씩씩 거리며 사진관 안으로 들어왔다. 가족사진을 찍는 게 영 어색하고 못마땅한 표정이다. 바쁜데 사람 오 라 가라 한다며 딸들을 나무라지만, 옆에서 팔짱을 끼며 생글생글 웃는 두 딸은 그런 아버지를 달래고 또 달랜다. 생전 처음 찍는 가족사진이 분명하다. 행복한 사진관 윤석용(36·사진) 실장은 특유의 유머감각을 살려 분위기를 띄운다.“아버님, 공포영화 포스터 찍으세요? 가족이 한바탕 싸우고 오셨습니까? 웃으세요. 자! 개구리 뒷다리”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넉살 좋은 농담을 던지는 윤 실장의 모습에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도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한 장만 찍고 가겠다던 말은 쏙 사라지고 표정이 점점 바뀌며 생글생글 두 딸의 얼굴을 닮아간다. ‘찰칵’ 그 순간, 최고의 한 컷이 카메라에 담겼다. 윤 실장이 사진사로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다.
편집 프로그램을 거쳐 완성된 사진을 본 아버님은 가족사진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두 딸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을 본 딸들은 더 크게 생글생글.‘행복한 사진’을 선사한 윤 실장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행복한 사진관에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모습이다.
윤 실장은 ‘사진을 찍는다’는 말보다 ‘사진을 담는다’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그는 단순히 카메라 셔터만 누르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에 의미를 부여해 자신이 느낀 것들을 사진 속에 담는 게 사진사란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증명사진이나 아기사진이 아닌 가족사진을 택해 사진관을 열게 된 이유도 가족이란 단어가 주는 따뜻함을 사진 속에 담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행복 스튜디오’가 아닌 ‘행복한 사진관’으로 이름 지은 것도 그러한 연유다.
“저의 행복보다 이곳을 찾아오는 분들의 행복을 먼저 떠올리며 가족사진이 주는 따뜻함과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손님들께 전하고 싶었어요.”
취미였던 사진을 윤 실장이 본격적으로 배운 건 지난 2005년. 대구직업전문학교에 사진기능사 자격증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업을 들으며 사진에 입문해 본격적으로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6개월 과정을 이수하고 마침내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그는 사진사의 길을 걷게 됐다. 처음에는 카메라와 사진을 공부했지만 지금은 피사체인 사람을 연구하는 ‘진짜 찍사’가 됐다.
윤 실장은 가족사진을 찍기 전 손님들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본다. 연령대, 가족수, 가족구성원 등을 물어보고 어떤 컨셉이 가장 잘 어울릴지를 미리 생각해 사진 촬영에 임한다. 그는 사진을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표현했다. 사진에는 설명도, 미사여구를 달 필요도 없다며 사진은 사진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가 그려낸 그림 중에는 아주 특별한 순간이 있다.
“퇴근을 앞둔 늦은 저녁, 사진관으로 전화가 걸려왔어요 여자분이었는데, 울먹이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어요. 그러면서 가족사진을 지금 찍을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근데 저희는 100%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어렵다고 그 분께 말했어요. 그러자 그 분이 말하길 어머니가 동산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암말기라서 길게 살아봤자 일주일이라는 선고를 받았다며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거예요. 저는 아차 싶은 마음에 어서 오시라고, 퇴근 안하고 기다리겠다고 말했어요. 얼마 후 딸 한 분, 아들 한 분, 그리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어머님 한 분이 사진관 안으로 들어왔어요. 어머님은 병마와 싸우느라 매우 초췌했는데, 따님의 부탁으로 먼저 어머님 영정사진을 찍고, 뒤에 가족사진을 찍었어요. 어머님이 자식들을 다독이며 애써 환하게 웃으시는데, 사진을 찍는 저도 울컥 하더군요.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예쁠 때, 행복할 때 가족사진을 찍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고, 그 가족에게는 마지막 가족사진이라는 생각에 더 마음을 써서 사진을 담았어요. 그 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윤 실장은 앞으로 대구에서 누군가 ‘가족사진’이라고 말하면 ‘행복한 사진관’을 먼저 떠올리는 그런 순간을 꿈꾸고 있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보물처럼 간직되는 그런 사진을 담고 싶어요. 이곳을 다녀간 분들이 제가 건넨 사진을 꺼내봤을 때, 행복을 느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넉살 좋은 농담을 던지는 윤 실장의 모습에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도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한 장만 찍고 가겠다던 말은 쏙 사라지고 표정이 점점 바뀌며 생글생글 두 딸의 얼굴을 닮아간다. ‘찰칵’ 그 순간, 최고의 한 컷이 카메라에 담겼다. 윤 실장이 사진사로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다.
편집 프로그램을 거쳐 완성된 사진을 본 아버님은 가족사진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두 딸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을 본 딸들은 더 크게 생글생글.‘행복한 사진’을 선사한 윤 실장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행복한 사진관에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모습이다.
윤 실장은 ‘사진을 찍는다’는 말보다 ‘사진을 담는다’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그는 단순히 카메라 셔터만 누르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에 의미를 부여해 자신이 느낀 것들을 사진 속에 담는 게 사진사란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증명사진이나 아기사진이 아닌 가족사진을 택해 사진관을 열게 된 이유도 가족이란 단어가 주는 따뜻함을 사진 속에 담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행복 스튜디오’가 아닌 ‘행복한 사진관’으로 이름 지은 것도 그러한 연유다.
“저의 행복보다 이곳을 찾아오는 분들의 행복을 먼저 떠올리며 가족사진이 주는 따뜻함과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손님들께 전하고 싶었어요.”
취미였던 사진을 윤 실장이 본격적으로 배운 건 지난 2005년. 대구직업전문학교에 사진기능사 자격증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업을 들으며 사진에 입문해 본격적으로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6개월 과정을 이수하고 마침내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그는 사진사의 길을 걷게 됐다. 처음에는 카메라와 사진을 공부했지만 지금은 피사체인 사람을 연구하는 ‘진짜 찍사’가 됐다.
윤 실장은 가족사진을 찍기 전 손님들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본다. 연령대, 가족수, 가족구성원 등을 물어보고 어떤 컨셉이 가장 잘 어울릴지를 미리 생각해 사진 촬영에 임한다. 그는 사진을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표현했다. 사진에는 설명도, 미사여구를 달 필요도 없다며 사진은 사진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가 그려낸 그림 중에는 아주 특별한 순간이 있다.
“퇴근을 앞둔 늦은 저녁, 사진관으로 전화가 걸려왔어요 여자분이었는데, 울먹이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어요. 그러면서 가족사진을 지금 찍을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근데 저희는 100%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어렵다고 그 분께 말했어요. 그러자 그 분이 말하길 어머니가 동산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암말기라서 길게 살아봤자 일주일이라는 선고를 받았다며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거예요. 저는 아차 싶은 마음에 어서 오시라고, 퇴근 안하고 기다리겠다고 말했어요. 얼마 후 딸 한 분, 아들 한 분, 그리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어머님 한 분이 사진관 안으로 들어왔어요. 어머님은 병마와 싸우느라 매우 초췌했는데, 따님의 부탁으로 먼저 어머님 영정사진을 찍고, 뒤에 가족사진을 찍었어요. 어머님이 자식들을 다독이며 애써 환하게 웃으시는데, 사진을 찍는 저도 울컥 하더군요.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예쁠 때, 행복할 때 가족사진을 찍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고, 그 가족에게는 마지막 가족사진이라는 생각에 더 마음을 써서 사진을 담았어요. 그 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윤 실장은 앞으로 대구에서 누군가 ‘가족사진’이라고 말하면 ‘행복한 사진관’을 먼저 떠올리는 그런 순간을 꿈꾸고 있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보물처럼 간직되는 그런 사진을 담고 싶어요. 이곳을 다녀간 분들이 제가 건넨 사진을 꺼내봤을 때, 행복을 느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