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고 닦으니 빛이 나더이다
갈고 닦으니 빛이 나더이다
by 청주교차로 2014.07.08
전국 최연소 ‘쌍용장’등극
이용기능장, 미용기능장 이유리 헤어디자이너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색하는 시간이 청춘의 시간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청춘표류>에 등장하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란 것이다. 부끄러움 없는 청춘, 실패 없는 청춘을 청춘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헤어디자이너 이유리 강사는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미용인의 꽃이라고 불리는 ‘미용기능장, 이용기능장 자격증’을 동시에 획득했다. 이른바 쌍용장에 등극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유리 헤어디자이너는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국 최연소 미용기능장, 이용기능장 동시 취득’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그녀는 처음 중학교 3학년에 국가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최고의 헤어디자이너를 꿈꿨다.
“중학시절 미용을 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부모님이 걱정하셨지만 늘 격려해주셨다. 3학년에 국가미용사 자격증을 따니 인정해주셨다. 그 뒤로 부모님은 날 믿어주셨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길을 정하다
“그때는 중학생이 미용자격증을 딴다고 하니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지요. 하지만 전 꼭 미용으로 성공하고 싶었거든요.”
부모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녀는 서울연희미용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전국의 미용고등학교가 세 곳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네일아트와 메이크업 자격증을 획득한 후, 청주로 다시 내려왔다. 그녀가 청주로 내려온 이유는 명확했다.
“졸업하면서 방송국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주성대 뷰티디자인과로 진학하게 된 것이다.”
이유리 헤어디자이너는 주성대에서 외래교수로 있던 이동범 교수를 만났다. 이교수는 2009년 충북에서 남성으로는 최초로 헤어디자이너의 꽃이라 불리는 ‘미용기능장’을 보유한 실력파 교수였다. 이교수 역시 1986년 충북지방기능올림픽 대회에서 동상을 수상입상을 계기로 각종 기능경기에서 수차례 메달을 획득했던 학구파 미용인이었다.
이동범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9년 만에 그는 건양대학교 뷰티디자인과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다시 서원대학교 산업대학원 향장미용과에 진학하여 논문 ‘탈색과 퍼머넌트 처리에 따른 연령별 여성모발 특성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주성대 외래교수로 활동하면서 후배들에게 커트 분야의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리 헤어디자이너에게 이동범 교수는 가야할 길을 알려준 셈이었다. 이교수처럼 기능장의 꿈을 꾸고 있었고, 오히려 스승을 넘어 ‘이용기능장, 미용기능장’을 동시에 합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유리 헤어디자이너는 학문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주성대를 졸업하고 곧 서원대 산업대학원 행정미용학과를 수료했다. 현재 그녀는 청주 뷰티인미용학원에서 열정적으로 헤어강의를 하고 있다.
3번 도전 끝에 이룬 ‘쌍용장’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색하는 시간이 청춘의 시간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청춘표류>에 등장하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란 것이다. 부끄러움 없는 청춘, 실패 없는 청춘을 청춘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헤어디자이너 이유리 강사는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미용인의 꽃이라고 불리는 ‘미용기능장, 이용기능장 자격증’을 동시에 획득했다. 이른바 쌍용장에 등극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유리 헤어디자이너는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국 최연소 미용기능장, 이용기능장 동시 취득’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그녀는 처음 중학교 3학년에 국가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최고의 헤어디자이너를 꿈꿨다.
“중학시절 미용을 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부모님이 걱정하셨지만 늘 격려해주셨다. 3학년에 국가미용사 자격증을 따니 인정해주셨다. 그 뒤로 부모님은 날 믿어주셨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길을 정하다
“그때는 중학생이 미용자격증을 딴다고 하니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지요. 하지만 전 꼭 미용으로 성공하고 싶었거든요.”
부모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녀는 서울연희미용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전국의 미용고등학교가 세 곳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네일아트와 메이크업 자격증을 획득한 후, 청주로 다시 내려왔다. 그녀가 청주로 내려온 이유는 명확했다.
“졸업하면서 방송국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주성대 뷰티디자인과로 진학하게 된 것이다.”
이유리 헤어디자이너는 주성대에서 외래교수로 있던 이동범 교수를 만났다. 이교수는 2009년 충북에서 남성으로는 최초로 헤어디자이너의 꽃이라 불리는 ‘미용기능장’을 보유한 실력파 교수였다. 이교수 역시 1986년 충북지방기능올림픽 대회에서 동상을 수상입상을 계기로 각종 기능경기에서 수차례 메달을 획득했던 학구파 미용인이었다.
이동범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9년 만에 그는 건양대학교 뷰티디자인과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다시 서원대학교 산업대학원 향장미용과에 진학하여 논문 ‘탈색과 퍼머넌트 처리에 따른 연령별 여성모발 특성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주성대 외래교수로 활동하면서 후배들에게 커트 분야의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리 헤어디자이너에게 이동범 교수는 가야할 길을 알려준 셈이었다. 이교수처럼 기능장의 꿈을 꾸고 있었고, 오히려 스승을 넘어 ‘이용기능장, 미용기능장’을 동시에 합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유리 헤어디자이너는 학문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주성대를 졸업하고 곧 서원대 산업대학원 행정미용학과를 수료했다. 현재 그녀는 청주 뷰티인미용학원에서 열정적으로 헤어강의를 하고 있다.
3번 도전 끝에 이룬 ‘쌍용장’
마침내 제55회 ‘미용기능장, 이용기능장’을 동시에 취득했다. 이른바 ‘쌍용장’에 등극한 것이다. ‘기능장’이란 무엇보다도 미용을 하는 사람이든, 이용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든 ‘기술의 꽃’이라고 인정하는 최고의 반열로 인정하고 있다. 그녀는 올해로 88년생, 25살이다. 전국 최초로 최연소자로 동시에 취득한 것이다.
지난 6월 27일 합격소식을 들었다. 세 번째 도전 만에 한분야의 합격도 어려운데, 둘을 동시에 취득했다. 그녀가 취득한 ‘이용기능장, 미용기능장’ 시험은 미용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7년 이상의 실무 경험이 있어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만큼 전문기술이 요구되는 관문이다. 미용업계에서는 보통 7~8수는 기본이란 말이 돌 정도로 까다로운 과정으로 알려져 있다.
“한 번씩 떨어질 때 마다 공부가 되었다. 그동안 정확도가 최고다. 긴장하면서 실수를 하게 되었다. 역시 숙련도의 문제였다. 시험문제는 철저하게 도면을 제공한다. 그 도면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머리를 만들어야 한다. 심지어는 몇 센티까지 정교하게 잰다.”
2011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이미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미용계에서는 실력을 검증받았던 미용인이 어쩌면 남성들의 분야라고 여겨지는 ‘이용기능장’까지 취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용기능장을 준비하면서 이용기능장도 함께 획득하고 싶었다. 미용이든, 이용이든 모두 사람의 머리를 예쁘게 정리하고 가꾸는 행위다. 그런 행위를 통해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가꾸는 것은 같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분야가 갖고 있는 독창적인 기술들이 있으니 서로 장점을 보완하면 한쪽만 아는 헤어디자이너보다 더욱 훌륭한 헤어디자이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환자가 병이 나면 일반 양의를 찾을 수도 있고, 한의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병을 치유하는 것이 목적이다. 양의든, 한의든 환자를 치료하는데 있어서 각각 보다 효율적인 치료방법이 있을 것이다. 양의와 한의가 공동으로 의학을 연구하면 환자들에게는 나쁠 것이 없다. ‘이용기능장과 미용기능장’을 동시에 취득한 그녀의 마음에는 그런 효율성과 합리성이 담겨있는 것이다.
“기술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 바탕위에 세계적인 헤어의 흐름과 변화하는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 이 길은 끝이 없는 길이다. 이제 시작인 것 같다. 배움 없이는 새로운 세상으로 결코 발을 딛을 수는 없다.”
25살의 이유리 헤어디자이너가 꿈꾸는 세상은 어디쯤일까. 그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2대째 제과제빵 기능장 탄생
지난 6월 27일 합격소식을 들었다. 세 번째 도전 만에 한분야의 합격도 어려운데, 둘을 동시에 취득했다. 그녀가 취득한 ‘이용기능장, 미용기능장’ 시험은 미용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7년 이상의 실무 경험이 있어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만큼 전문기술이 요구되는 관문이다. 미용업계에서는 보통 7~8수는 기본이란 말이 돌 정도로 까다로운 과정으로 알려져 있다.
“한 번씩 떨어질 때 마다 공부가 되었다. 그동안 정확도가 최고다. 긴장하면서 실수를 하게 되었다. 역시 숙련도의 문제였다. 시험문제는 철저하게 도면을 제공한다. 그 도면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머리를 만들어야 한다. 심지어는 몇 센티까지 정교하게 잰다.”
2011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이미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미용계에서는 실력을 검증받았던 미용인이 어쩌면 남성들의 분야라고 여겨지는 ‘이용기능장’까지 취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용기능장을 준비하면서 이용기능장도 함께 획득하고 싶었다. 미용이든, 이용이든 모두 사람의 머리를 예쁘게 정리하고 가꾸는 행위다. 그런 행위를 통해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가꾸는 것은 같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분야가 갖고 있는 독창적인 기술들이 있으니 서로 장점을 보완하면 한쪽만 아는 헤어디자이너보다 더욱 훌륭한 헤어디자이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환자가 병이 나면 일반 양의를 찾을 수도 있고, 한의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병을 치유하는 것이 목적이다. 양의든, 한의든 환자를 치료하는데 있어서 각각 보다 효율적인 치료방법이 있을 것이다. 양의와 한의가 공동으로 의학을 연구하면 환자들에게는 나쁠 것이 없다. ‘이용기능장과 미용기능장’을 동시에 취득한 그녀의 마음에는 그런 효율성과 합리성이 담겨있는 것이다.
“기술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 바탕위에 세계적인 헤어의 흐름과 변화하는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 이 길은 끝이 없는 길이다. 이제 시작인 것 같다. 배움 없이는 새로운 세상으로 결코 발을 딛을 수는 없다.”
25살의 이유리 헤어디자이너가 꿈꾸는 세상은 어디쯤일까. 그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2대째 제과제빵 기능장 탄생
2대째 제과제빵 기능장 이종화, 이성호 부자
2대째 제과제빵의 한 우물을 파온 부자(夫子)가 이번에는 아들이 제과제빵 기능장으로 탄생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시청 맞은편 (주)크레시앙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이종화 원장의 아들 이성호씨는 올해 나이 33세다. 이성화 부원장은 충북 유일의 제과제빵 기능장이었던 아버지 이종화 원장의 뒤를 이어 이제 2대째 제과제빵 기능장이 된 것이다.
이종화 기능장의 아들인 이성호(33)부원장은 2002년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하고 2009년 동우대학 호텔제과제빵과를 졸업했다. 2013년 9월에는 케이크 마스터 2급과 초콜릿 아티스트를 취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6월 27일 제과제빵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했다. 마침내 부자 기능장이 탄생한 것이다. 한편 이성호 부원장은 2002년 10월 서울국제 빵 과자전 마지팬 케이크 부분 ‘기술 장려상’을 비롯해서 2008년에는 아시아 푸드 페스티벌 설탕공예 부분 금상을 수상했고, 2009년 5월에는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충북지역 금상을 수상한 실력파다.
아버지인 이종화 대표는 “기술을 배우면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평생의 재산이 된다. 아들이 나의 일을 배우고 나와 함께 제과제빵 전문인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라고 말한다.
후진 양성에 힘을 쓸 것
대전하면 성심당, 부산에는 옵스, 광주에는 궁전제과가 유명하다. 이처럼 각 지방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제과점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청주는 오래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지역제과점이었던 쟝글제과가 사라지면서 향토제과점의 명맥이 끊겼다. 현재는 대기업의 체인점만 나날이 확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인 제과제빵 전문 기술인은 사라지고 본사에서 공급받는 빵과 케이크를 파는 판매인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장인정신에 입각해서 빵을 만들어내는 제과점은 ‘크레시앙 제과점’이다.
청주농협중앙회 맞은편에 자리 잡은 (주)크레시앙 아카데미는 제과점뿐만이 아니라 커피와 제과제빵을 배우려는 수강생들을 위해 최고의 시설과 기술을 완벽하게 갖춘 아카데미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레시앙 아카데미는 1층에는 우동, 돈가스, 스파게티, 다양한 케이크와 빵을 준비해 놓은 제과점과 퓨전레스토랑을 동시에 겸비한 복합매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2층에는 커피 바리스타 교육장과 제과, 제빵 교육장으로 활용한다. 크레시앙 아카데미 이종화 대표는 “이곳은 단순한 제과, 제빵 학원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 발전시킬 것이다.”라며 “이제 아들도 제과제빵 기능장으로 자부심을 갖고 학원에서 제과제빵 전문인을 양성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2대째 제과제빵의 한 우물을 파온 부자(夫子)가 이번에는 아들이 제과제빵 기능장으로 탄생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시청 맞은편 (주)크레시앙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이종화 원장의 아들 이성호씨는 올해 나이 33세다. 이성화 부원장은 충북 유일의 제과제빵 기능장이었던 아버지 이종화 원장의 뒤를 이어 이제 2대째 제과제빵 기능장이 된 것이다.
이종화 기능장의 아들인 이성호(33)부원장은 2002년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하고 2009년 동우대학 호텔제과제빵과를 졸업했다. 2013년 9월에는 케이크 마스터 2급과 초콜릿 아티스트를 취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6월 27일 제과제빵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했다. 마침내 부자 기능장이 탄생한 것이다. 한편 이성호 부원장은 2002년 10월 서울국제 빵 과자전 마지팬 케이크 부분 ‘기술 장려상’을 비롯해서 2008년에는 아시아 푸드 페스티벌 설탕공예 부분 금상을 수상했고, 2009년 5월에는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충북지역 금상을 수상한 실력파다.
아버지인 이종화 대표는 “기술을 배우면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평생의 재산이 된다. 아들이 나의 일을 배우고 나와 함께 제과제빵 전문인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라고 말한다.
후진 양성에 힘을 쓸 것
대전하면 성심당, 부산에는 옵스, 광주에는 궁전제과가 유명하다. 이처럼 각 지방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제과점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청주는 오래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지역제과점이었던 쟝글제과가 사라지면서 향토제과점의 명맥이 끊겼다. 현재는 대기업의 체인점만 나날이 확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인 제과제빵 전문 기술인은 사라지고 본사에서 공급받는 빵과 케이크를 파는 판매인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장인정신에 입각해서 빵을 만들어내는 제과점은 ‘크레시앙 제과점’이다.
청주농협중앙회 맞은편에 자리 잡은 (주)크레시앙 아카데미는 제과점뿐만이 아니라 커피와 제과제빵을 배우려는 수강생들을 위해 최고의 시설과 기술을 완벽하게 갖춘 아카데미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레시앙 아카데미는 1층에는 우동, 돈가스, 스파게티, 다양한 케이크와 빵을 준비해 놓은 제과점과 퓨전레스토랑을 동시에 겸비한 복합매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2층에는 커피 바리스타 교육장과 제과, 제빵 교육장으로 활용한다. 크레시앙 아카데미 이종화 대표는 “이곳은 단순한 제과, 제빵 학원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 발전시킬 것이다.”라며 “이제 아들도 제과제빵 기능장으로 자부심을 갖고 학원에서 제과제빵 전문인을 양성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 ‘빵’ 개발계획
지금까지 이종화 대표가 충북 유일의 제과 기능장이었다. 기능장은 ‘장인 중에 장인’을 말하는 대명사다. 이종화 기능장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특이한 이력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의 빵과 케이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역특산물과 연계한 제품의 개발하여 히트한 명품 제조사다.
19살부터 제과제빵과 연을 맺기 시작한 아버지 이종화 기능장은 강원도 속초에서 도널드베이커리란 상호로 최고의 명품 제과점으로 입지를 다졌다. 그때 이종화 기능장이 개발한 상품이 그 유명한 ‘오징어 빵’이었다. 오징어를 물에 삶은 후 국물은 밀가루를 반죽하고, 오징어 살은 야채와 함께 갈아서 속살을 만들어 영양가 만점인 식사대용의 빵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원장은 “그때 ‘시바 국제 빵 과자 전시회’가 서울서 열렸다. 강원도 속초에 어울리는 빵을 만들고 싶었다. 강원도 동해바다에는 오징어가 지역 특산물이니, 오징어를 이용한 빵을 만들게 된 거다. 오징어 빵이 ‘KBS 6시 내 고향 편’에 방송되자 불티나게 팔렸다. 속초에 관광 온 손님들이 ‘오징어 빵’을 사기위해 길게 줄을 섰을 정도로 장관이었다.”라고 그 때를 회상한다.
속초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종화 기능장은 2004년 청주 용암동에 도널드베이커리를 오픈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제과제빵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청주에서 다시 승부를 건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용암동에 있는 ‘도널드 베이커리’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맛있는 빵집으로 입소문이 퍼졌다. 그러면서 그는 또 다시 지역특산물과 연계된 제품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었다.
앞으로 인생의 남은 목표가 후학 양성이라는 이종화 기능장은 아들의 입성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든든한 원군을 만난 듯 같은 기능장인 아들 이성호 기능장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본다.
새롭게 아버지와 함께 기능장이 된 이성호(33)부원장은 “아버지가 현장에서 쌓은 기술만이 아니라, 경험한 지식과 장인정신까지도 함께 전해야 된다. 일본처럼 오래된 전통기술을 전하는 한국식 도제제도의 양성화도 필요하다.”라며 “가장 용기 있는 자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뤄놓은 이 일을 함께 하는 일은 소중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 취재.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 사진. 이승민 기자 iunsan@hanmail.net
지금까지 이종화 대표가 충북 유일의 제과 기능장이었다. 기능장은 ‘장인 중에 장인’을 말하는 대명사다. 이종화 기능장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특이한 이력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의 빵과 케이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역특산물과 연계한 제품의 개발하여 히트한 명품 제조사다.
19살부터 제과제빵과 연을 맺기 시작한 아버지 이종화 기능장은 강원도 속초에서 도널드베이커리란 상호로 최고의 명품 제과점으로 입지를 다졌다. 그때 이종화 기능장이 개발한 상품이 그 유명한 ‘오징어 빵’이었다. 오징어를 물에 삶은 후 국물은 밀가루를 반죽하고, 오징어 살은 야채와 함께 갈아서 속살을 만들어 영양가 만점인 식사대용의 빵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원장은 “그때 ‘시바 국제 빵 과자 전시회’가 서울서 열렸다. 강원도 속초에 어울리는 빵을 만들고 싶었다. 강원도 동해바다에는 오징어가 지역 특산물이니, 오징어를 이용한 빵을 만들게 된 거다. 오징어 빵이 ‘KBS 6시 내 고향 편’에 방송되자 불티나게 팔렸다. 속초에 관광 온 손님들이 ‘오징어 빵’을 사기위해 길게 줄을 섰을 정도로 장관이었다.”라고 그 때를 회상한다.
속초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종화 기능장은 2004년 청주 용암동에 도널드베이커리를 오픈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제과제빵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청주에서 다시 승부를 건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용암동에 있는 ‘도널드 베이커리’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맛있는 빵집으로 입소문이 퍼졌다. 그러면서 그는 또 다시 지역특산물과 연계된 제품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었다.
앞으로 인생의 남은 목표가 후학 양성이라는 이종화 기능장은 아들의 입성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든든한 원군을 만난 듯 같은 기능장인 아들 이성호 기능장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본다.
새롭게 아버지와 함께 기능장이 된 이성호(33)부원장은 “아버지가 현장에서 쌓은 기술만이 아니라, 경험한 지식과 장인정신까지도 함께 전해야 된다. 일본처럼 오래된 전통기술을 전하는 한국식 도제제도의 양성화도 필요하다.”라며 “가장 용기 있는 자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뤄놓은 이 일을 함께 하는 일은 소중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 취재.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 사진. 이승민 기자 iuns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