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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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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 불, 혼(魂)은 하나

쇠, 불, 혼(魂)은 하나

by 청주교차로 이승민 2014.07.15

50년째 외길 인생 ‘증평대장간’ 최용진 기능전승자

장맛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여름의 대지에서 흙냄새가 짙게 풍겨난다. 증평읍내로 접어드니, 우체국이 보인다.
“아~, 증평읍내로 들어와서 우체국이 보이면 곧바로 우회전 한 뒤, 조금만 올라오면 대장간이 보일 겁니다.”
증평읍내의 장터 한 쪽에 대장장이 간판이 보인다. 조그만 소읍의 전형적인 골목을 거슬러 오르니, 시골 촌부처럼 자리 잡고 있는 대장간 풍경은 낯설지만, 신기하기도 했다. 거대한 산야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사는 선인의 풍경이 연상되었으니 말이다.
모든 대장간 둘레에는 오래된 쇠의 무거움이 드리워있었다. 어쩐지 집안 전체가 쇠의 무게로 눌려 땅으로 푹 꺼질 것만 같았다. 50년 동안 대장장이의 외길을 걸어온 장인 최용진(66)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는 내리지만, 습도가 차서 더욱 무더운 공간에서 여전히 붉은 쇳덩이를 들고 모루에 대고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마에는 연신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음으로 재단하고, 마음으로 두드려

“쇠의 길이를 어름하고 자르고 두드리는 것은 마음이 시켜서 하는 겁니다. 쇠의 성질이 곧 쇠의 마음이니, 마음을 읽으면 쇠가 유순해지는 불의 온도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두드릴 때, 내 혼이 스며들면 비로소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거죠.”
문밖에는 비가 내리고 화덕에서는 불꽃이 사납게 일렁인다. 쇠는 자기의 온몸이 달궈져 붉게 변하면 아기처럼 유순해진다. 대장장이 최씨는 그 쇠를 두드리고 펴고 감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형태가 갖추어진다. 커다란 드럼통에 담긴 물에 ‘촤악’하고 몸을 식히면, 뿌연 연기를 내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비로소 쇠는 생명을 부여받고 자신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치는 벼락은 천신의 무기이고 대지는 그 벼락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망치는 벼락이며, 모루는 땅인 것이다. 머리로는 하늘의 정기를 내려 받고 다리로는 땅의 정기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대장장이는 그들의 정기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호미, 쇠스랑, 낫, 도끼, 가위, 문고리, 칼 등은 비로소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의 혼이 담긴 제품들의 손잡이 부분에는 화인을 찍는다.
‘대장장이 최용진’
어느덧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장장이 최용진’의 제품은 브랜드가 되었다. 동네사람 뿐 아니라, 외지에서도 그를 찾아온다. 천안에서 왔다는 서진태(52, 자영업)씨도 그의 오래된 단골이다. 그는 “천안에서 장어집을 운영한다. 장어를 손질하는데 특수한 칼이 필요한데, 최용진 선생님의 칼이 제격이다. 칼날이 무뎌지면 꼭 이곳에서 갈아간다. 칼을 아는 사람이 가는 것과 모르는 사람이 가는 것은 차이가 있다. 써보면 안다. 칼의 진가를.”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식칼하면 독일의 쌍둥이 칼을 꼽는다. 하지만 대장장이 최용진씨의 생각은 다르다.
“식칼하면 많은 사람이 독일의 쌍둥이 칼이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대장간에서 제대로 만든 칼을 못 따라 간다. 우리의 농기구, 석공도구, 무기류, 목공도구 등에 대장장이의 혼을 집어넣으면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태어난다.”라고 말한다.

마법의 손, 대장장이의 손
대장간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쇳덩이를 불에 빨갛게 달궈 철판 위에 놓고 돌리면 동그랗게 철이 휘어지고 망치로 두드리면서 모양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 이어졌다. 보통 대장장이의 모습을 보면 오른쪽에는 망치를 왼쪽은 두터운 장갑을 낀 채 쇠를 두드리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장갑을 끼는 이유는 망치질로 손이 수없이 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용진씨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는다.
“장갑을 끼면 마음이 닫히고, 손끝에서 느끼는 미세한 감각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손을 다치는 한이 있어도 일을 할 때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손은 거칠고 엉망이었다. 망치를 두드리는 과정에서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그였지만, 거친 작업환경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인 것이다. 그가 마치 마법사처럼 쇠를 망치로 ‘뚝딱’거리면 그의 손끝을 거친 연후에는 마술사의 품에서 금방 비둘기가 나르고, 꽃이 피듯 엿장수 가위가 나오고 문고리가 툭툭 튀어나온다. 모든 쇠들은 그의 손을 거치면 하나의 생명을 얻듯 춤을 추며 제 몸을 식히면서 하나의 형상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형태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임에 맞게 각도를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농부가 손에 익는 각이 있어요. 그걸 모르면 쓸모없는 용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대장간을 들어서면 빈 공간이 없을 만큼 촘촘하게 농기구들이 걸려있고 쌓여있다. 농기구 박물관이 따로 없었다. 특이한 장식물이 방문자들의 눈길을 끈다. ‘농기구 키 장식’이란 작품이다. 농기구인 키의 윗부분에 쇠스랑, 낫, 도끼를, 밑 부분은 엿장수 가위, 문고리, 호미를 장식해 놓은 것인데 충북 관광상품 ‘창작아이디어 상품 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 제품은 각종 민속품을 필요로 하는 매장이나 외국인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전통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다
사업을 하던 부친의 사업이 기울어졌다. 그동안 아버지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던 그는 초등학교를 마치면서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대장장이 일을 배워야 했다.
“대장장이 일을 하면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의 이 한마디가 그의 삶을 바꿔 놓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충주에서 매형이 유명한 대장장이였다. 16살 무렵, 충주에 살고 있는 매형 집에서 대장간 일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처음 매형에게 일을 배울 때는 막연했어요. 하지만 배우다보니 쇠와 나는 어쩐지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남들은 가능하면 요령을 피울 때, 나는 틈만 나면 화덕 앞에 앉아 열심히 일을 했어요. 그냥 대장간 일이 좋았습니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무섭게 몰두하던 그였기에 남들보다 3~4년 빨리 일을 배웠다. 풀무질부터 시작해서 쇠를 다루는 법, 화덕의 불을 조절하는 방법, 쇠가 순응되는 온도와 빛깔 등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온 전통 대장장이의 기술들을 익혀나갔다. 1974년 처음으로 증평에 6평짜리 작은 작업실과 살 집을 구해 매형으로부터 독립했다. 인근 고물상을 찾아다니면 풀무를 사고 화덕도 마련했다. 하지만 29살의 젊은 혈기의 그의 기술은 다른 대장장이보다 월등히 뛰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름이 알려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찾는 손님들이 드물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물건을 만들었다. 낫 하나, 호미 하나를 만들 때도 자신이 인정할 때까지 망치를 두드리고 폈다.

반복은 최고의 훌륭한 스승
“수없이 반복하다보면 어느 경지에 도달하게 되더군요. 남들이 낫을 하루에 100자루 만들면 전 500자루 이상을 만들었어요.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무기류나 생활용구를 보면 반드시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것이든 손님이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도 겁이 안 났어요.”
그렇게 몇 년이 흐르자, 단골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증평 대장간의 물건은 확실하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에 이르자, 전통 대장간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디고 투박한 수제품보다, 빠르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농기구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왔다. 제품은 월등히 우수했지만, 가격 경쟁력에서 밀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손으로 하던 풀무대신 송풍기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 전통방식 그대로 이어갔다. 난로용 석탄인 괴탄을 넣은 화덕에 불을 피운 뒤 쇠를 달궈 망치질하는 작업을 반복하고 물에 담금질을 한다.
쇠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적당한 열처리와 담금질이다. 그는 “우리 전통의 대장일은 어떤 계산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다. 똑같아 보이는 쇠라도 특성이 모두 다르고, 불도 바람의 세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쇠, 불과 마음이 한순간 서로 통해야 합니다.”라며 “내가 고집하는 물건이 자신 있으면,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만의 방식은 세상을 이겨나갔다. 그가 만든 제품은 식칼, 가위부터 낫, 호미와 같은 전통 농기구 등 200여 종에 달한다. 자신이 만드는 제품은 전통방식을 고집했지만 판매하는 방식은 혁신적이었다.
스마트폰이 처음 출시되자, 제일 먼저 구입해 작동방법을 익혔다. 그리고 그는 증평대장간에 머무르지 않고,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과 널리 소통했다. 외국인 친구들도 늘어나자, 영어도 틈틈이 익혔다. 카카오 스토리나, 여러 SNS를 통해 자신의 작업과정과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 점점 그의 존재와 기술은 세상에 퍼졌다. 그러자 전국각지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가장 전통적인 농기구들을 가장 첨단인 스마트폰의 유통경로를 이용해 팔았다. 그야말로 이 시대의 신(新)지식인 것이다.

나를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다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과 친해졌어요.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여행도 다니게 되었죠. 나만의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면서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또 다른 행복이었습니다.”
그 덕분일까. 그의 작품들은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칼, 낫, 쇠스랑, 창, 망나니 칼, 엿장수 가위 등 무수한 주문이 밀려왔다. 몇 해 전 방영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쓰인 철퇴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요즈음 아웃도어가 열풍인 가운데 그의 창작품 등산지팡이는 자연과 현대의 조화로움을 빗어낸 듯 멋스럽다. 하나쯤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든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상품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전국의 유명한 전통축제 때면 최용진씨는 대장간 시연 초청 1순위다. 그는 대장장이의 참 모습을 알리려 전국 어느 곳이든 불러만 주면 달려간다. 그는 40년 동안 설과 추석 명절 빼고 대장간을 쉰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일 년에 한 달은 무조건 문을 닫고 미지의 세상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일 년에 단 한 달은 오직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온 세월이었잖아요? 대장간의 문을 닫을 땐, 지인들이 대장간을 봐줍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도 대장장이 헤파이토는 당당히 신(神)의 한축을 차지한다. 그만큼 대장장이의 위세는 높았다. 다이달로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의 자손이었으며 최고의 발명가이기도 했다. 도끼, 송곳, 자 등 그가 발명한 숱인 창의적인 연장들은 문명을 진보시키는 이기(利器)가 되었다.
대장장이 최용진(66)씨는 전승자 이야기를 하자, 얼굴에 잠시 그늘이 진다.
“일이 힘들고 배우는 과정이 길다보니, 젊은 사람은 대드는 사람이 없어요. 혼과 전통문화가 깃든 기술을 전수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 일을 즐겨야 하는데…. 뭐든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된 요즘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배우라고 권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