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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촬영의 주무대가 된 이곳, 부산 감천문화마을

영화촬영의 주무대가 된 이곳, 부산 감천문화마을

by 오민기 2015.02.27

/ 오민기 기자 futurelove20@naver.com


부산 사하구 감천 2동에 위치한 "감천 문화마을". 이곳은 각종 TV 예능 프로그램, 드라마, 영화 촬영으로 한해 40만 명 정도의 방문객이 다녀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최근 영화 흥행률 역대 2위를 차지한 영화의 배경이 되면서 이곳은 앞으로 더욱 많은 관광객이 방문할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부산의 랜드마크 해운대, 광안대교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 했던 이곳 감천 문화마을이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관광객을 불러일으켰을까?

1960~70년대 경제성장 과정에서 이곳 감천문화마을의 인구율은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노년층만이 남게 되고 재개발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옴으로써 대책 마련이 시급해졌다.

2009년, 감천문화마을에 주거하는 4,500여 세대, 그 안에 9,600여 명의 주민과 예술가, 그리고 자치단체가 참여하는 "마을 미술 프로젝트"가 그 대안으로 나오면서 마을은 창작 전시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또한 골목 사이로 벽화와 예술작품의 배치로 인해 마을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여느 외국 부럽지 않은 파스텔톤의 항구도시가 만들어진 셈이다.

우리가 감천문화마을을 보는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건 없는 것 같다.
선사시대부터 이곳은 상당한 마을의 형태를 갖추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수 개의 지석묘(고인돌)가 발굴됨으로써 그곳에서 부족사회가 지배하고 있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말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부산포와 가깝고 다대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수문과 공청이 세워졌다

하지만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그곳은 온전한 마을의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느끼는 시선을 침략해 온 그들 또한 느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마을 곳곳에는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공동목욕탕, 공동우물, 공동 빨래터 등이 자리 잡고 있는데, 한국전쟁 발발시 대부분의 북쪽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이곳 감천문화마을로 피난을 왔다고 한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감천문화마을은 "마을 미술 프로젝트 "가 시작하기 전 "태극도 마을 "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는데, 이는 한국전쟁 당시 신흥종교인 태극도를 교도들이 이곳 감천문화마을로 정착함으로써 불렸다고 한다.

감천동, 그곳은 병풍과 같이 천마산, 장군산, 금치산이 펼쳐져 있고 감천항을 두송반도가 길게 뻗어내려 감천만이 깊숙이 들어가 천연의 항구가 된 마을이다. 많은 관광객 유치와 문화적인 발전을 통해 마을의 인지도는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주민들의 불편 거리는 하나둘 늘어가는 시점이다.

복잡한 골목 사이로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는 차들,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그곳 주민들은 쉽사리 좁은 골목을 드나들지 못하는 장면을 수차례 목격했다. 누군가 내 집 앞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끊이질 않고 이어진다는 생각을 한다면 아마 그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 속담에 이러한 말이 있다.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

유능한 뱃사람은 거친 바닷속에서도 능숙히 배를 저을 수 있듯, 이곳 감천문화마을 또한 그렇다.
거친 역사를 지나서 오직 문화와 예술적인 부분만으로 이곳을 발전시킨 감천문화마을 주민들과 예술가 및 자치단체들의 역할은 말 그대로 공동체의식이 빛난 대표적인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들의 작품 앞에서 다소 경솔한 모습으로 인한 훼손을 하지 말아야 하는 시점이다.

A smooth sea never made a skillful mariner.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 -영국속담-

/ 사진.글 오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