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전남지사의 길'…3선 도백에서 대선까지
'朴 전남지사의 길'…3선 도백에서 대선까지
by 뉴시스 2012.07.16
2004년 전남도지사 당선 이후 내리 3선해직기자 출신, 청와대 대변인 등 거쳐
【무안=뉴시스】송창헌 기자 = '3선 도지사'인 박준영 전남지사(65)가 15일 대권에 공식적으로 도전장을 내면서 그의 드라마틱한 삶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언론인 출신으로 청와대 대변인과 국정홍보처장 등을 거친 뒤 광주·전남 광역단체장으론 처음으로 3선에 성공했던 박 지사는 '관운 좋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가난과 고난으로 점철됐던 과거의 기나긴 터널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공이 더욱 빛을 발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6년 영암 삼호면 산호리(현 삼호읍)에서 가난한 농부의 9남매 중 8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박 지사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이를 깨치고 일어서는 한 편의 감동 드라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유년시절은 행복했다. 그러나 목포중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가 갑자기 병석에 누우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당장 고교 진학을 미뤄야만 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직접 땅을 갈고, 거름지게(일명 똥지게)를 지면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부친이 사망하자 상경한 박 지사는 낮에는 중국집 등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고, 밤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야간고에서 학업에 열중했다. 주경야독으로 서울 인창고와 성균관대 정치학과까지 고학으로 마친 후, 1972년 중앙일보에 입사했으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언론 탄압에 항의했다가 강제해직됐다.
고향에서 일어난 살육의 현장을 외면한 언론보도에 반발하며 신문제작거부에 앞장선 것이 이유였고, 해직은 그의 일생에 첫번째 전환점이 됐다.
해직 후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공부'로 방향을 틀어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1987년 오하이오대학에서 신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중앙일보에 복직, 뉴욕특파원을 거쳐 편집부국장까지 지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그의 인생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는다.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고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고 청와대행을 결심한 그는 공보수석 겸 청와대 대변인, 국정홍보처장을 거치며 김대중 대통령의 입이자, 국민의 정부 '얼굴' 역할을 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남북간 화해의 장을 연 역사적 현장에 동행했고 그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 기록하는 역할을 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특히 2000년 6월15일 새벽, '6·15선언으로 알려진 남북간 합의문을 직접 발표했던 그 긴박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산가족 상봉, 남북철도 연결, 개성공단 등 6·15선언에 담긴 남북간 화해협력 선언은 박 지사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면서 내놓은 남북 협력체제 구상의 단초가 된 것들이다.
DJ, 민주당과의 인연은 박 지사가 2004년 박태영 지사 유고에 따른 재보궐 선거의 승리와 2006년에 이어 2010년 지방선거에서 3선 성공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서남해안관광레저형기업도시(일명 J프로젝트)와 적자 구조의 F1 대회 등 과제와 미흡한 점도 적진 않지만 '전남의 운명을 바꾸자'는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그는 지난 8년간 가난과 좌절을 딛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듯 소외와 낙후의 상징인 전남의 새로운 운명을 일구기 위해 뛰었다.
그동안 친환경 농어업을 비롯해 신재생 에너지, 미래산업, 기업유치, 해양관광활성화 등에 역점을 두고 도정을 이끌었고, 그 성과가 하나하나 가시화되고 있다.
'참배나무에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 난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격언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원칙과 노력을 중시하는 그는 지독한 독서광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관리인 최부가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하다 6개월만에 돌아온 고난을 기록한 '표해록'을 읽은 것이 인연이 돼 중국 실력자인 시진핑(習近平) 국가 부주석과도 친분이 두터워졌을 정도다.
한편 도지사 선거만 치렀을 뿐 대선은 물론 국회의원 선거도 경험이 없는 점과 당내 지지기반이나 외곽조직이 취약한 점은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박 지사의 숙제가 되고 있다.
goodchang@newsis.com
【무안=뉴시스】송창헌 기자 = '3선 도지사'인 박준영 전남지사(65)가 15일 대권에 공식적으로 도전장을 내면서 그의 드라마틱한 삶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언론인 출신으로 청와대 대변인과 국정홍보처장 등을 거친 뒤 광주·전남 광역단체장으론 처음으로 3선에 성공했던 박 지사는 '관운 좋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가난과 고난으로 점철됐던 과거의 기나긴 터널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공이 더욱 빛을 발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6년 영암 삼호면 산호리(현 삼호읍)에서 가난한 농부의 9남매 중 8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박 지사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이를 깨치고 일어서는 한 편의 감동 드라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유년시절은 행복했다. 그러나 목포중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가 갑자기 병석에 누우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당장 고교 진학을 미뤄야만 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직접 땅을 갈고, 거름지게(일명 똥지게)를 지면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부친이 사망하자 상경한 박 지사는 낮에는 중국집 등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고, 밤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야간고에서 학업에 열중했다. 주경야독으로 서울 인창고와 성균관대 정치학과까지 고학으로 마친 후, 1972년 중앙일보에 입사했으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언론 탄압에 항의했다가 강제해직됐다.
고향에서 일어난 살육의 현장을 외면한 언론보도에 반발하며 신문제작거부에 앞장선 것이 이유였고, 해직은 그의 일생에 첫번째 전환점이 됐다.
해직 후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공부'로 방향을 틀어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1987년 오하이오대학에서 신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중앙일보에 복직, 뉴욕특파원을 거쳐 편집부국장까지 지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그의 인생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는다.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고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고 청와대행을 결심한 그는 공보수석 겸 청와대 대변인, 국정홍보처장을 거치며 김대중 대통령의 입이자, 국민의 정부 '얼굴' 역할을 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남북간 화해의 장을 연 역사적 현장에 동행했고 그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 기록하는 역할을 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특히 2000년 6월15일 새벽, '6·15선언으로 알려진 남북간 합의문을 직접 발표했던 그 긴박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산가족 상봉, 남북철도 연결, 개성공단 등 6·15선언에 담긴 남북간 화해협력 선언은 박 지사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면서 내놓은 남북 협력체제 구상의 단초가 된 것들이다.
DJ, 민주당과의 인연은 박 지사가 2004년 박태영 지사 유고에 따른 재보궐 선거의 승리와 2006년에 이어 2010년 지방선거에서 3선 성공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서남해안관광레저형기업도시(일명 J프로젝트)와 적자 구조의 F1 대회 등 과제와 미흡한 점도 적진 않지만 '전남의 운명을 바꾸자'는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그는 지난 8년간 가난과 좌절을 딛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듯 소외와 낙후의 상징인 전남의 새로운 운명을 일구기 위해 뛰었다.
그동안 친환경 농어업을 비롯해 신재생 에너지, 미래산업, 기업유치, 해양관광활성화 등에 역점을 두고 도정을 이끌었고, 그 성과가 하나하나 가시화되고 있다.
'참배나무에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 난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격언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원칙과 노력을 중시하는 그는 지독한 독서광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관리인 최부가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하다 6개월만에 돌아온 고난을 기록한 '표해록'을 읽은 것이 인연이 돼 중국 실력자인 시진핑(習近平) 국가 부주석과도 친분이 두터워졌을 정도다.
한편 도지사 선거만 치렀을 뿐 대선은 물론 국회의원 선거도 경험이 없는 점과 당내 지지기반이나 외곽조직이 취약한 점은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박 지사의 숙제가 되고 있다.
goodchang@newsis.com